회사를 떠난 사람들 23 _ 개발자. 퇴사 후 두려움의 늪을 건너다.



▶ 자기소개

저는 1978년생 39세 ㅇㅇㅇ 입니다. 회사에서는 개발자로 일했고 퇴사 후 소프트웨어 아카데미를 준비 중 입니다.

 

▶ 학교부터 직장까지의 커리어는?

ㅇㅇ대학교 97학번으로 전기공학을 전공했다. 예전부터 로봇 만드는걸 좋아했다. 학부 때 ㅇㅇ연구원에서 위촉연구원으로 들어가서 전기, 전자, 소프트웨어 관련 일을 했다. 일이 잘 맞고 재미있어서 대학원까지 공부를 했다. 취업을 앞두고는 로봇에 너무 빠져있었다. 너무 재미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취업 시 삼성, LG 같은 대기업에 지원하지도 않았다. 사실 토익 점수도 낮았다. 원서를 읽고 공부하는 데는 문제가 전혀 없었기에 토익 공부에 시간을 쏟고 싶지 않았다. 차라리 그 시간에 로봇을 만드는 것이 더 좋았다. 그래서 지인을 통해서 셋탑박스를 만드는 회사에 엔지니어로 일을 시작했다. 좋아하는 일이었고 회사를 얻는데 에너지와 시간을 쏟는 대신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2006년에 첫 회사에 들어가서는 일이 너무 재미있었고 보람도 있었다. 엔지니어로서 느낄 수 있는 성취감과 행복감을 충분히 느끼며 일을 했다. 인증을 위해 해외 출장도 다니면서 영어실력이 엄청나게 발전하고 엔지니어로 기술력도 느는 것도 정말 행복했다.


첫 회사를 그렇게 5년을 다녔다. 인도에서 가장 큰 미디어 회사의 프로젝트를 했는데 금액이 엄청나게 컸다. 그 프로젝트 때문에 거의 일년 반 이상을 인도에서 살았다. 당시 결혼을 약속한 지금의 아내와 점점 크게 싸우게 되었다. 오래 떨어져 있다보니 어쩔 수 없이 문제가 생긴 것이었다. 그러다가 결혼을 했는데 신혼여행에서 한국으로 돌아오는 날, 다시 짐을 싸서 밤 비행기로 인도로 떠났다. 그 정도로 일에 얶매인 삶이었고 당연히 신혼도 없었다. 아이가 태어나고 일주일 후에 지금은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나라도 또 출장을 갔었다. 이 바닥에서는 사실 이혼이 심심찮게 들려오는 소식이기도 하다.


서울 근교의 작은 반지하 전세 집에서 신혼생활을 시작했는데 아마 그 때부터 아내가 다른 일을 해 보는건 어떠냐?”라는 말을 했던 것 같다. ‘왜 그러냐?’라고 물어 봤더니 하는 말이 나도 모르게 우울하다라는 것이었다. 그만큼 개인의 삶이란 아예 없이 회사밖에 몰랐었다. 아내는 엄청나게 밝은 사람이었는데 우울감이라는 단어를 듣고 눈빛을 보니 이렇게 사는 것이 맞나?’ 하는 의문이 들었다. 2009년도에 회사를 그만두겠다고 얘기를 했다. 이 업계에서 이직 서너번은 다 하는 거고 아직 젊고 내 기술이면 재 취업도 가능하니 회사를 그만두자라고 얘기를 했다. 아내도 나도 퇴사통보를 하고 전세방 한쪽 벽에 유럽전도를 붙여 놓았다. 목표는 3개월간의 유럽 자동차 여행이었다. 이직계획도 아무것도 없었지만 유럽여행을 준비하는 기간은 너무 행복했다. 아내의 얼굴에도 다시 미소가 피어났다.


▶ 그렇게 회사를 그만둔거였나? 

아니다.  퇴사 결심을 하고 여행 준비를 하던 중 알고 있던 업계의 영업사원에게 전화가 왔다. “중국의 큰 회사에서 셋탑박스 사업을 시작하려고 조직을 새로 만들고 있다. 거기에 한국 엔지니어를 모르는데 생각이 있냐?” 라는 것이었다. 중국회사에서 시한 월급은 환율을 생각하면 당시 받던 연봉의 2배가 훌쩍 넘었다. 통장에 꽂히는 돈이 매달 700만원이 넘었다. 우리나라에서 1억 연봉을 받으면 통장에 NET 으로 꽂히는 돈이 600만원 후반인 것으로 안다. 또 집은 당연하고 3개월에 한번씩 휴가와 한국행 티켓을 준다는 조건이었다. 아내는 우울한 마음을 떨치기 위해 중국 행을 긍정적으로 생각했다. 그러다 며칠 후 그 회사에서 비행기표를 보내왔다. 공장 투어를 해 준다는 거였다. 나를 포함해서 업계 사람들 십여 명 정도로 구성된 사람들이 중국으로 날아갔다. 직원수가 육천 명이 넘는 회사고 잘 구성된 연구단지 안에 자리 잡고 있었다


게다가 훌륭한 복지와 놀랄만한 월급이라니 누구라도 마다할 수가 없었다. 그 당시 나이가 서른 두 살 정도였는데 여행을 포기하고 아내도 퇴사를 하고 중국으로 갔다. 26개월 정도 중국의 회사에서 일을 했는데 지금 돌아보면 아내와 함께 가장 행복행복 시기였던 것 같다. 아내도 돈 걱정도 없고 회사사람들과 일에 대한 스트레스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사실 부부간의 불화는 도박이나 불륜 정도 아니고서는 당사자간의 문제는 생각보다 적다. 고부간의 갈등 친척, 지인들 때문에 문제가 생기는데 그럴 이유가 아예 없었기 때문이었다. 530분에 퇴근해서 함께 저녁을 먹고 중국 특유의 오랜 휴가도 맘껏 즐겼다.







▶ 어떻게 다시 한국으로 오게 되었나? 

한국으로 돌아오게 된 계기는 그냥 짤린거였다. 어느 날 우리를 담당하는 부서의 장이 찾아와서는 폭탄선언을 하고 가버렸다. 회사의 회장이 바뀌면서 외국인으로 구성된 조직을 없애라고 했다는 것이다. 나중에 알고 보니 우리의 연봉은 외국인 채용 시 정부로부터 받는 돈으로 주고 있었다. 결론적으로 국가에서 받은 돈으로 월급 주면서 나를 포함한 한국 엔지니어의 기술을 쏙 빼먹은 거였다. 그리고 버린 것이었다. 그 후 2달 동안의 시간을 주고 엔지니어 들은 모두 흩어졌다. 그렇게 2012년에 한국으로 다시 돌아오게 되었다.

그리고 지금 다니고 있는 회사로 회사로 입사하게 되었다. 솔직히 처음에는 다시 한국에서 일하는 것에 적응하기가 힘들었다. 우선 중국에서 월급이 많고 물가가 싸다 보니 몸에 배였던 씀씀이 때문 이었다. 헤프게 쓴 건 아니었는데 꼼꼼하게 가계부를 적으면서 살지는 않았기에 첫 해는 적자였다. 한 일년 정도 지나니 한국에 적응이 다시 되었고 회사에서 인정도 받기 시작했다. 다시 큰 프로젝트에 투입되게 되었다. 해외에서의 인증작업도 처음부터 끝까지 책임을 지고 하게 되었다. 예전과 마찬가지로 한국보다 해외에서 일하는 날이 더 많은 삶이었고 다시 아내는 혼자가 되었다. 중국으로 가기 전과 100% 똑 같은 삶이 시작되었다.

                                    

아니나 다를까 아내도 답답해 하기 시작했고 서로 떨어져 있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서로간의 벽같은게 생기기 시작했다. 영상통화 백날 해도 그 답답함과 알 수 없는 먹먹함은 심해져 갔다. 마치 권태기의 부부 같았다. 어느 날 똑같이 현지에서 새벽까지 일을 하고 돌아와서 아내와 영상통화를 했다. 아내의 말이 이제는 이 일, 이렇게 사는 삶을 그만두자라고 말했다. 이건 부부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하는 아내의 말이 아직도 기억난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아내의 우울에 대한 힘든 상황이 다시 시작된 것 같았다. 그렇게 통화를 마치고 돌아서는데 찝찔한 것이 입안에 느껴졌다. 거울을 보니 코피였다. 두 달이 넘게 매일 새벽까지 일을 하니 당연한 일이었다. 아내는 더 이상은 이렇게 못살겠다고 하고, 남편은 타지에서 매일 철야로 몸이 망가지고…… 이런 것이 사는건가? 내가 살아있는 건가? 라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코피를 쓰윽 닦는데 회한이 들어 웃음이 피식 났다.

 

맡았던 프로젝트를 끝내고 한국에 다시 돌아와서 첫 출근을 한 날. 팀장에서 그만두겠다고 말했다. 이유는 회사에서 거절하기 힘든 것으로 골랐다. 아내와 오래 전부터 계획한 세계일주 여행이었다. 2015 10월에 회사를 그만두고 정확히 7일 후에 여행을 떠났다. 5살 아들과 함께 한 70일 정도의 여행이었다. 그렇게 딱 10년간 회사생활을 했다.

 

▶ 포털의 퇴사와 관련된 자극적인 글들이 많다.  잘나가는 삼성 때려치고 세계일주 가다” 뭐 이런 제목 많은데 그런 거였나?

전혀 아니다. 살기 위한 여행이었다. 우리 가족의 행복을 찾기 위한 것이었다. 어찌 보면 중국에 가기 전 아내의 우울감이 극에 달했을 때 회사를 그만두고 떠나기로 했던 여행을 실제로 행동으로 옮긴 거였다. 조금 극단적이기는 했지만 아내나 나나 너무 지쳐 있었기 때문에 한국 땅을 떠나야겠다고 생각했다. 사실 중국에서 한국으로 돌아온 후 나의 삶은 이전과 똑같았다. 아무것도 변한 것 없었다. 그냥 잠시 미뤄놓은 것뿐이었다. 사실 여행은 특별한 계획도 없이 떠났다. 예약한 것은 출발하는 비행기와 각 도시별로 숙소 뿐이었다. 네델란드의 아무도 모르는 도시에서 한달, 그리고 스위스의 고산 지대에 있는 한국인을 잘 모르는 도시에서 또 한 달을 살았다. 독일하고 스웨덴에도 오로라를 보기 위해 짧게 다녀왔다.

 


▶ 퇴사를 하는데 아내의 영향이 더 큰것 같다. 어떤가?

아내의 의지가 더 컸던 것 같다. 나는 힘이 많이 들기는 했지만 회사의 일만 보면 싫지는 않았다. 내 입으로 말하긴 뭐하지만 나는 일을 잘했다. 소위 Ace였고 엔지니어로서 뿌듯함도 많이 느꼈다. 나 혼자만 본다면, 만약 결혼을 하지 않았다면 버틸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가정이 있었고 아내와 아들이 있었다. 아침에 새벽같이 나가느라 애 얼굴도 못 보고, 밤에 야근하고 늦게 들어와서 또 못 본다. 이것 까지는 뭐 한국의 여느 가장과 다르지 않다. 하지만 일년에 70% 이상을 해외에서 컴퓨터에 머리박고 일만하고, 아이도 얼굴도 컴퓨터를 통해서만 보는 삶. 뭐 거기까지도 한국이니까 버틸 수 있다고 치자.

하지만 아내가 던지는 삶의 방향에 대한 질문에는 할 말이 없었다.  지금 이렇게 힘들지만 그래도 열심히 하면 1~2년 후에는 나아진다는 확신이 있느냐?” 답은 없었다. 이 계통의 엔지니어들의 경로는 똑같다. 회사에 남는 것은 두 가지다. 정치를 잘해서 관리자로 올라가는 것. 아니면 오래 다니더라도 똑같이 코딩하고 해외에서 20대와 똑같이 일하는 것이다. 나는 그래도 인정을 받았기에 40대 후반까지는 개발자로 살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순전히 내 생각이었다. 하지만 아내의 그 질문에는 답을 할 수 없었다. 아내가 그렇게도 힘들어 하는 삶을 계속 살아가라고 남편으로서 강요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내의 생각은 명확했다. 내가 40대 후반까지 개발자 일을 하면 지금과 똑 같은 우울한 날들의 연속일 거고, 40대 후반에 무언가 새로운 일을 시작하는 것은 정말 어렵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40대 후반까지 남은 10년을 이렇게 살아가는 동안 우리 둘의 사이가 틀어지지 않으리란 보장도 없었다. 하지만 지금 이렇게 무모한 달리기는 멈추고 세상으로 뛰어 들면 우리 부부 사이가 벌어질 일은 없을 것이다.

지금 나이에 조금함을 잠깐 버리고 1~2년 제대로 된 삶을 살고 안되면 다시 개발 일을 할 가능성도 있지 않느냐? 지금 잠깐 멈추고 미래를 준비하자.” 틀린 말은 하나도 없었다. 하지만 나는 이 일 외에 무엇을 잘하는 지도 모르겠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도 모르겠다고 했다. 솔직히 한번도 생각해 본적이 없었다. 40대 후반에 다른 일을 하는 거는 우스개 소리로 많이 나오는 개발자 치킨집 수렴의 법칙에 정확히 들어 맞는 것뿐이었다.

 

▶ 그 말에 뭐라고 답했는가?

아내의 말을 한마디로 줄이면 <돈을 벌면서 살 건지, 인간답게 살 건지> 였다. 아내와 나와 잘 맞는 부분이 돈에 큰 욕심이 없다는 거다. 물론 많이 벌 수 있는 기회가 있다면 벌 것이다. 하지만 많은 돈을 벌지 못하더라도 그 상황에 맞추어 살면 된다고 믿었다. 어찌보면 내가 퇴사를 선택한 것은 내 가족과의 인간다운 삶을 위해서 였다. 선택에 정답은 없지만 아내와 나는 같은 가치를 믿고 있었고 그것을 선택했던 것이다.

 

▶ 회사에는 어떤 사람이었나?

회사일 자체는 재미있었다. 새로운 프로젝트를 위해 좋은 사람들과 합심해서 일하는 것이 좋았다. 인증 성공에서 얻는 희열과 성취감도 좋았다. 말했지만 경험이 쌓이면서 나름 회사 내에서 Ace로 인정도 받고 있었다.

 

▶ 그렇다면 회사나 일 자체가 싫어서 그만둔 것은 아닌것 같다. 

맞다. 일은 좋았다. 보통의 엔지니어, 개발자 들은 회사내의 암투나 정치 줄대기 이런 것에 그닥 관심이 없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마지막에 떠나게 된 회사에서는 원치 않게 이런 끈적끈적한 일들에 얽힐 수 밖에 없었다. 회사에 이익이 많이 났는데 Profit Sharing을 하지 않고 배당금만 주었다. 사장이 두 개의 법인을 운영했는데 회계적으로 이익을 다른 회사로 돌려서 직원들에게 돈을 주지 않았다. 그런 일이 있고 나니 내가 이런 회사에서 이렇게 까지 피땀 흘려 가며 일할 필요가 없겠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일에서부터 시작된 회사에 대한 불신도 하나의 계기였다. 회사와 관련된 오너의 전횡이 많지만 얘기하고 싶지는 않다.  부정적인 기운이 들어서 그렇다. 

 

▶ 회사를 떠나는데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사람이 아내다. 아내의 뜻대로 떠난 것에는 후회가 없나?

솔직히 말하면 나 스스로 회사를 떠나야겠다.’ 라는 갈망은 없었던 것 같다. 만약 아내가 얘기를 안 했다면 나는 계속 욕하면서 회사를 다녔을 거고 마이 마흔 후반 되어서 타의로 회사를 나왔을 것이다. 아내의 의사가 반영된 퇴사이긴 하지만 그로 인해 가정은 더 평안해 졌고 행복해 졌기에 후회하지는 않는다.

 

▶ 회사를 그만두고 느낌이 어땠나?

회사에 퇴직의사를 밝혔음에도 인사권자가 나를 만나주지도 않았다. 꼴보기 싫다는 것 같았다. 그러다 보니 내가 정상적으로 퇴사를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힘들게 2달동안 인수인계를 마치고 회사를 나올 때의 느낌은 너무너무 좋았다. 아이를 얻었을 때만큼 좋았던 것 같다.

 

▶ 그만두고서 계획은 있었나?

대책이나 계획은 없었다. 여행계획을 제외하고는

 

▶ 혹시 모아놓은 돈이 많나? 집이 부자인가? 어떻게 먹고 살 대책이 없이 그만뒀나?

아니다. 부모님도 힘들게 아직도 작은 일을 하고 계시고 아내의 부모님도 작은 자영업을 하신다. 부자는 아니다. 

 

▶ 아무리 그래도 인간적으로 너무 무대책 아닌가?

퇴직금 이천만원 받은 것으로 계산기를 두르려 봤다. 아껴서 써서 200만원씩 최소한의 생활비로만 쓴다면 일년은 버틸 돈이었다. 아내가 가장 걱정한 것은 나의 감정상태였다.

아무런 대책도 없이 30대 후반에 회사를 그만둔 공돌이 가장. 당신이 얼마나 막막하고 절벽앞에 선 느낌인지 조금은 안다. 그 시간이 너무 힘들거고 어쩌면 아내인 나와도 트러블이 생길 수도 있다. 지금은 우리 세 가족이 똘똘 뭉치고 같은 생각을 공유하고 얘기하는 시간이 중요하다. 그러니 이 돈으로 함께 여행을 떠나서 마음의 면역력을 키우자. 이천만원보다 더 가치 있는 시간이 될꺼다.”

아내의 이 말을 듣고 아냐, 돈 아껴야 돼라고 얘기할 수가 없었다. ‘무대책'이라는 단어에 가벼움이 묻어나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 단어엔 '안타까움', '절실함' 그리고 중요한 '단순함'이 담겨있기도 하다. 절실함에 이끌려 대책을 세우려 했지만 찾지 못하는 안타까움이 있는 것은 물론이요, 복잡한 세상살이를 향해 '대책 없는게 뭐 어때서!' 라며 어줍지 않은 단순함으로 반항 한번 해보고자 하는 그런 마음 말이다

 

▶ 아이가 출근하지 않는 아빠에 대해 아무 말 안 하나?

아이가 유치원생인데 한번도 아빠는 왜 이제 회사 안가?”라는 질문을 한적이 없다. 아이가 아빠 오늘 회사 안가고 나랑 놀아주면 안되?” 라는 질문에 아빠가 회사를 가야 니가 좋아하는 로봇이나 레고도 사주고 빕스도 데려가 줄 수 있어이렇게 답하는 경우가 많다. 사실 이 질문은 내가 아닌 아내가 받았다. 아내는 아이에게 아빠는 아빠가 정말 좋아하는 일이 있어. 사람은 꼭 회사가 아니더라도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살 수도 있어.” 이렇게 얘기했다고 들었다. 신기한 건 돈 얘기는 전혀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아빠의 출근 = = 내가 원하는 것을 얻는 것> 이라고 가르쳐 본적이 없어서 아예 묻지도 않은 것 같다. <아빠가 출근 안함 = 내가 좋아하는 레고를 얻지 못함> 이라는 인과관계가 아예 생기지도 않은 것 같다.

 

▶ 인터넷에 글도 쓰고 있다. 왜 쓰나?

나를 위해서 쓰기 시작했다. 죽을듯한 감정을 이겨내기 위해 썼다. 나는 10년 동안 일만하고 해외에 처박혀서도 일만했다. 그렇게 일밖에 모르던 내가 아무 대책없이 회사를 그만둔 건 내 인생에서 가장 큰 변화다. 그 안에서의 감정의 변화는 어마 어마 하다. 내가 한번도 겪어보지 형용 할 수 없는 이상한 감정, 또 아침에 일어 났는데 갈 곳이 아무곳도 없다는 절망감이 주체할 수 없이 밀려왔다. 이런 감정은 겪어보지 않으면 절대로 알 수 없다. 여행에서 돌아오고 나서 약 두 달 정도는 정말 힘이 들었다. 말로 표현하기도 힘들다. 만약 도서관에서 책을 읽지 않고 사람들을 만나지 않았으면 어디 가서 자살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매일 도서관에 가서 책을 미친듯이 읽었다

그 안에 마음의 평안을 조금씩 얻고 동네 앞에 국수집에도 가서 국수 한 그릇을 먹으면서 사장님과도 얘기도 많이 했다. 그 분도 회사를 다니다가 나와서 일을 하는 분이라 친형님처럼 얘기를 들어주었다. 그렇게 책을 읽고 사람을 만나면서 감정이 조금씩 변해 갔다. 마치 한번 Impulse 처럼 크게 튀어올라 주체할 수 없던 감정이 조금씩 안정되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공돌이고 글쓰기에 큰 소질은 없지만 이런 감정의 소용돌이를 잊기 전에 남겨두고 싶었다. 그래서 썻다. 이제 곧 마흔이 되고 인생의 절반 정도를 살았는데 지금 느끼는 이런 감정의 변화는 앞으로 남은 인생을 살아가는데 분명 큰 도움이 될거라 믿었다.

 






▶ 사람들을 만났다는 건 뭔가?

그렇게 감정의 변화를 조금씩 이겨내면서 블로그에 글을 쓰면서부터 만남이 시작되었다. 내 글을 읽고 나와 비슷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이 얼굴이라도 한번 보자고 연락해온 것이다. 주로 회사를 떠나고 싶어서 미칠 것 같다는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먹고 살 준비가 안되어있고, 내가 뭘 좋아하는지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도 모르겠고, 가정도 있고 아내가 허락을 안 해서 진퇴양난인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내가 회사를 나오게 되면서 느낀 감정, 그리고 지금 겪는 미칠듯한 불안과 서서히 자신을 돌아보는 느낌 이런 것이 자신의 감정과 너무너무 똑같다고 생각해서 연락을 했다. 그들이 어떤 답을 구하려고 나를 만난 것은 아니었다. 물어보지도 않았다. 같은 감정을 느끼는 다른 사람이 있다는 것에서 큰 위안을 얻는 것 같았다. ‘나 혼자만 이런 감정을 느끼고 있는게 아니구나’, ‘나와 같은 사람이 있구나라고 공감하는 자체가 소중했다. 공통된 특징이라면 결혼을 했고 가정이 있고 책임을 져야 할 누군가가 있고 무언가를 찾고 싶어하는 사람들 이었다는 거다.

 

▶ 왜 우리는 비슷한 삶을 산다고 생각하나? 좋은 학교, 좋은 직장만 쫓다가 용도가 끝나면 버려지고 그 이후에 괴로워하다가 힘들게 새로운 삶을 사는 것 말이다. 특히 개발자라면 개발자 치킨집 수렴의 법칙이라는 인터넷의 우스개 글도 있을 정도다.

나도 생각해 본적은 없다. 지금 고민해 보자면 비슷한 삶의 시작은 비교에서 시작되는 것 같다. 남보다 좀더 많은 연봉, 옆집 아빠보다는 좋은 차. 이런 것이 비교의 시작이다. 삶의 기준이 남으로부터 나오기 때문인 듯 하다. 조금 더 말하면 남이 말하는 것, 그리고 남이 나를 어떻게 볼까 하는 시선에서 시작되는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이 원하는 것을 찾아 적극적으로 행동하지 못하는 것 같다. 삶의 좌표가 남으로부터 시작된 것이기 때문인 것 같다. 회사에서는 오랫동안 회사에서 원하는 것만 따라 하면 되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물이 목까지 차 올라서 곧 죽을지 모른다는 공포감이 밀려와야만 깨닫게 되는 것 같다.

 

▶ 공대 나와서 일을 하는 것인 인문계열보다 낫지 않은가?

공대생 같은 경우는 굵고 짧고 인문계는 가늘고 긴 것 같다. 공대생은 기술을 가지고 있으면 당장 필요한 기술자의 경우 많은 돈을 받을 수도 있다. 경제적으로 좀 낫다. 하지만 그 수명이 짧고 갑자기 떨어진다. 나도 이제 곧 40대 인데 수명이 거의 끝나가는 느낌이 든다. 그런데 인문계열의 일을 하는 사람들은 인생에 대해 깊게 생각하고 적은 돈을 벌지만 오랫동안 할 수 있는 일을 하는것 같다. 내 주위에 있는 사람들을 보면 그렇다는 것이다.

 

▶ 비슷한 일을 하는 개발자 후배에게 회사를 나온 입장에서 조언을 해 준다면?

솔직히 결혼을 하지 않은 후배에게는 해 줄 말은 없다

결혼한 후배라면 돈이 전부가 아니다. 아내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길 바란다. 가정에 소홀하지 말아라. 아내와 같은 생각을 하고 같은 곳을 바라보는 것이 정말 중요하다. 안 그러면 공대 나온 사람은 회사에서 짤리는 순간 끝난다. 아내가 특히 정신적으로 동감을 하고 도움을 준다면 다시 시작할 힘을 얻을 수 있을 거다. 이건 돈을 많이 벌고 적게 벌고의 문제가 아니다. 가장으로서 퇴사를 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감정의 다스림이다. 아차 잘못하면 극단적인 선택을 할 수도 있을 정도이기 때문이다.” 뭐 이런말 정도 일 듯 하다.

나는 안다. 이 느낌 이 지랄맞은 감정은 느껴보지 않은 사람에게는 그저 개 풀 뜯어 먹는 소리일 뿐이다. 퇴사 후 느끼는 감정은 경험해 보지 않고는 절대 모른다. 경험이 같지 않다면 전혀 공감할 수 없기에 나는 이 감정은 경험한 사람들에게만 혹은 듣기 원하는 사람에게만 얘기한다. 사람들은 그냥 누가 회사를 몇 살에 때려 치고 나와서 창업해서 좀 힘들다가 지금은 잘되 회사 다닐 때보다 몇 배는 더 벌어. 뭐 이런 류의 얘기만 들으려 한다.  

모바일 포털에서 회사를 때려치우고 몇 년간 세계 일주한 이야기뭐 이런 것들 것 많은데. 그 자체로는 좋다. 하지만 그런 곳에서는 그냥 표면적인 성공 세속적인 멋짐만 다루려 한다. 그 과정까지의 감정과 삶의 변화 이런 것에는 그냥 소홀하다. 아쉬운 부분이다. 퇴사한 사람들의 성공스토리만 듣는다고 바뀌는 건 없다. 내가 그가 아니기 때문이다. 차라리 그 과정 동안의 감정의 변화와 그것을 어떻게 노력을 했는지에 대해서 얘기해 주면 더 좋을 것 같다.

 

▶ 요즘 일상은 어떤가?

아침에 일어나서 아내와 같이 아이 밥을 먹이고 유치원에 대려다 준다. 그리고 아내와 함께 동네 뒷산을 산책한다. 동네 아줌마들은 많이 만나는데 우리 부부 사이가 좋아 보인다고 부러워한다. 가끔은 조조할인 영화도 본다. 돌아오면 아내는 지금 계획 중인 집의 도면을 짜고, 나는 준비하고 있는 소프트 웨어 아카데미의 커리큘럼을 짠다. 나는 천상 개발자이고 할 수 있는 일도 소프트웨어 개발이기 때문에 이 일을 준비한다. 이걸로 대박을 치거나 하는 생각은 없고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함이다. 내 능력 안에서 적당한 생활비만 벌어도 만족한다. 블로그와 홈페이지를 만들고 있다. 그러다가 3시가 넘으면 아이를 유치원에서 데려오고서 아이와 계속 놀아준다. 힘에 부칠 정도로 놀아준다. 아이가 8시에 잠이 들면 아내와 집의 설계도에 대해 같이 논의하고 블로그에 글도 집중해서 하나 쓴다. 그렇게 지내고 있다.

 

▶ 회사를 그만두고서 얻은게 있다면?

회사를 떠나서 나는 아들을 다시 얻었다. 아이는 어릴 적에 아빠 집을 인도로 알았다. 하도 오랫동안 인도에 출장을 가 있으니 그런 것이다. 또 아이가 아빠얼굴을 보지 않으면 아빠로서의 존엄성은 전혀 없고 무시한다. 나와 아이의 관계가 예전에 그러했다.아빠는 아빠 집이 회사니까 회사나 가. 인도로 가버리고 들어오지 마이런 얘기까지 들었다. 나는 아이에게서 사랑받지 못하는 아빠였다. 이제는 완전 달라졌다. 유치원에서 돌아오자 마자 아빠 오늘은 이거 하고 놀자라고 나에게 달려든다. 힘들 때도 있지만 행복하다. 아내도 마찬가지다. 함께 논의하고 얘기하고 차마시고 산책하고 또 미래를 고민하고 하는 이 시간 속에서 너무 벅차오르는 행복감을 느낀다고 한다. 나는 앞이 너무 깜깜하고 자려고 누워서 잠도 안 오고 답답한데도 손을 잡아 주면서 . 행복하다라고 말해 준다. 그렇게 아들 그리고 아내와의 관계가 행복함으로 정리되다 보니 나의 자존감도 높아졌다. 그러다 보니 깜깜하고 어두운 감정이 조금 빨리 사라졌던 것 같다.

나도 마찬가지다. 태어나서 처음 겪어보는 이 시간이 이제는 선물처럼 느껴진다. 이 업계에서는 나를 위한 삶을 생각할 수도 없다. 2~3달 동안 해외로 출장을 나가면 회사에서 나에게 쏟는 돈이 수천 만원 아니 억대가 들 수도 있다. 실제로 회사에서 . 이번 프로젝트에 너한테 들어가는 돈이 얼만지 알아? 정신차려이런 말도 한다. 그런 말을 들으면 다른 생각을 아예 할 수도 없다. 그저 좀비처럼 일만 하는 거다. 나를 위한 삶,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고민할 여유는 아예 없다. 그저 살아 숨쉬고 회사의 목표를 이뤄주기 위해서만 시간을 쓴다. 퇴사한 이후 8개월 동안 내가 겪고 있는 일들 그 안에서 나의 생각과 감정은 돈으로 환산할 수도 없을만큼 소중하다.  

나는 아들, 아내 그리고 잃어버린 나 자신도 찾고 있다. 잃어버린 것은 정말 돈 뿐이다. 이제는 돈 때문에 상처 받지 않는다. 아내가 나를 믿어주고 있기 때문이다. 든든하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사에 다니면서 이런 건 좀 하고 나올걸하고 아쉬움이 드는 부분은?

그게 없다는 건 거짓말일거다. 나도 얍샵하게 회사생활을 못했다는 것이 아쉽다. 일과 내 삶의 균형을 맞춰보려는 시도조차 하지 못했다는 것이 아쉽다. 너무 병신처럼 헌신해서 일한 것이 후회된다. 나도 적당히 챙길건 챙기면서 살걸 하는 생각이 크다.

회사의 목표는 돈을 버는 것이다. 회사는 100이라는 돈을 주고 200 아니 500을 뽑아내려고 한다. 그건 당연한 거다. 냉정하게 말하면 말이다. 하지만 그런 상황에서 그저 빨대만 꽂혀서 그 빨대를 빼려고 노력해보지 않았다는 것이 안타깝다. 남처럼 거짓말이라도 하면서 뭐라도 배우고 강의도 듣고 경험도 쌓았어야 했다. 그랬다면 이렇게 큰 충격이 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 내가 무엇을 잘하고 어떤 것에 관심이 있는지 자신의 소리와 욕망에 귀 기울여 본적 있는가?

생각 해봤다. 하지만 모르겠다는 것이 답이었다. 내 스스로의 욕망은 무언지 찾지 못했다. 물론 찾으려고 노력은 해 봤다. 사실 그 노력이 충분했는지는 모르겠다. 회사라는 새장 속에서 주는 모이만 먹고는 내가 생각하고 고민했던 노력이 불충분 했을 것도 같다. 회사를 나와서 보니 진짜 그렇다. 회사를 나온 지금도 답을 찾지는 못했다. 지금은 그것에 대해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회사 안에서 갖지 못했던 여러 가지 경험과 질문을 스스로에게 하며 그것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백만여 원이 넘는 학원도 끊어 봤고 여러 가지를 탐구하고 있다.

회사는 알게 모르게 개인을 위한 생각을 하는 것을 막으려 한다고 본다. 그래야만 온전히 회사, 그리고 회사 일에만 집중하게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 아직은 회사를 떠나서 돈을 벌고 있지는 않다. 이에 대한 불안은 없나?

아직은 불안하지 않다. 아직 준비단계이기도 하고 경제활동을 시작하지 않아서 인 것 같다. 했는데 잘 안되거나 하면 불안할 수도 있겠지만 지금은 없다.

 

▶ 재취업을 할 생각은 없나? 아직 서른 아홉인데

솔직히 말하면 회사를 그만두면서 마지막으로 믿는 구석이 재취업이었다. 그래도 아직은 나를 써줄 곳, 내 가치를 인정해 줄 곳이 있겠지 라고 생각했다. 아내는 내가 자신 스스로를 찾는 탐구, 지금까지 해 왔던 일이 아닌 다른 길을 찾으려는 활동을 하지 않는 이유가 바로 재취업에 대한 믿는 구석 때문이라고 했다. “적당히 해보다가 안되면 다시 회사로 돌아갈 생각이 있지?” 라는 질문에 뜨끔했다. 나를 꽤 뚫고 있었다. 아내는 그럼 헤드헌터에게 전화해 보라고 했다. 실제로 전화를 해 보니 이 바닥의 공기는 냉랭했다. 채용계획이 있는 곳은 거의 없었다. 아내에게 그렇게 안이한 내 생각을 들키고 난 후, 그리고 시장의 상황을 알게 된 후 재취업의 생각을 우선 접었다. 퇴로를 막고 다시 생각하기로 했다.

 

▶ 서울 근교로 이사할 계획이 있다고 들었다. 어떻게 결심하게 되었나?

회사를 그만두고 아내와 내가 함께 세운 버킷리스트 중 하나였다. 가족이 함께 여행하면서 프라하에 가보고 오로라를 보는 것도 버킷리스트에 있었다. 그런데 그것을 이미 이루었다. 또 하나는 마당이 있는 내 땅, 내 집 마당에서 강아지를 키우며 사는 것이었다.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 그랬다. 회사 생활하면서 주말에 겨우 짬을 내서 양평, 가평 이런 곳을 아내와 돌아다녔다. 괜찮은 곳을 찾기도 했는데 직장문제 때문에 포기했었다. 전원주택, 마당이 있는 집에서 살려면 70km에 육박하는 편도 출퇴근을 감수해야 했다. 하루 4시간을 길바닥에 버려야 했다. 이런 단점을 상쇄시킨 만한 장점을 회사 다닐 때는 찾을 수 없었다. 지금은 직장이 없다보니 상쇄시킬 것 자체가 사라졌다

퇴사 이후에 여행을 다녀온 후 우연히 ㅇㅇ마을 이라는 타운하우스가 생긴다고 해서 한번 가봤다. 가서 설명을 듣고 둘러본 후 아내와 차 안에서 바로 결정했다. 직장이 없어서 출퇴근 걱정이 없기에 가능했다. 웃기지만 그랬다. 이곳으로 이사를 오고 이곳에서 먹고 살만한 일을 찾거나 출퇴근에 구애 받지 않는 일을 알아보자고 했다. 그렇지 않고서는 평생토록 이 버킷리스트를 이룰 수 없다고 생각했다. 저지르지 않으면 변화의 싹이 틀 수가 없었다. 십 년 동안 조금씩 모아온 돈을 탈탈 털어서 샀다.

 

▶ 성공하고 싶은 마음은 없나?

없다. Never. 흔히들 말하는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성공은 더더욱 없다. 만나는 사람들도 어떻게 하면 돈을 많이 벌까?’ 하는 생각만 하는 사람들을 잘 만나지 않는다. 얘기하면 피곤이 몰려온다.

 

▶ 그럼 인생의 모토가 있다면?

적당히 벌어서 잘 살고 싶다. 적당하다는 걸 계산해 보니 3식구로 볼 때 200만원 정도면 되는 것 같다. 세상은 이 제테크를 해야 하고 이걸 해야 해. 안 그러면 나중에 폐지나 줍게 된다.’ 이렇게 사람들에게 겁을 준다. 대부분은 그 말을 듣고 믿고 겁에 질려 살아간다. 하지만 인간의 존엄성을 잃지 않고 작은 행복감을 느끼고 내가 원하는 삶의 가치를 추구하면서 살기에 필요한 돈만 있으면 된다. 그것이 꼭 일년에 수 천만원, 혹은 은퇴 후 몇 십억은 아닐 것이다. 적어도 나에게는 말이다. 경제적 존엄을 잃지 않으면서 우리의 가치에 맞게 아이를 교육시키면서 살자고 아내와 얘기했다. 인간으로서 존엄, 동시에 자족하는 행복한 삶 그게 나와 내 가족이 원하는 삶이다. 텐인텐이라는 직장인들을 위한 돈 모으기 카페가 있다. 우리나라 일반 직장인들이게 십년안에 십억은 가당찮은 얘기다. 꿈팔이랑 다를게 없어 보였다. 누구나 십년안에 십억을 벌면 그 십억의 가치가 십억은 아닐 것이다.

많은 사람에게 인생의 좌표, 되고자 하는 바를 물어보면 경제적 자유인이라고 말한다. 이 말은 내가 남 보기에 쪽팔리지 않을 만큼 써도 문제 없을 만큼 벌고 싶다는 뜻이다. 이건 한도 끝도 없게 된다. 그런 삶은 없다. 끝이 없다. 남과 비교하며 사는 삶을 끊어냈기 때문에 지금 나는 가능한듯 하다. 나는 인간으로 나의 가치를 잃지 않는 존엄적 가치인이 되고 싶다. 비교하고 싶지 않다. 내 가치가 중요하다.

 

▶ 지금 당신처럼 대책을 세우지 않고 회사를 떠난 사람, 그리고 딱 한 달이 지난 사람이 있다고 하자. 그 사람에게 해 주고 싶은 말은?

내가 그 순간을 겪어 봤기 때문에 어떤 조언도 들리지 않을 것임을 잘 알고 있다. 이 시기는 특히 그렇다. 들리지 않기 때문에 해 줄 말은 없고 나에게 와서 하소연을 한다면 충분히 들어줄 수수 있을 것 같다. 필요한 것은 부딪힘과 시간이다.

 

▶ 직장생활연구소를 어떻게 알게 되었나?

회사를 떠나고 나서 검색창에 퇴사, 퇴직이런 것들은 많이 찾아 봤다. 대부분이 나 오늘부터 회사 안감. 아 너무 좋다.’ 뭐 이런 짧은 순간의 생각들을 적어 놓았다. 직장생활연구소처럼 회사를 떠난 다양한 연령대의 사람들에 대해서 연재하는 곳은 없었다. 그래서 즐겨찾기를 해 놓고 퇴사충동이 생길 때 마다 들어가서 글을 읽었다. 내 생각에 대해 지지를 받고 싶었기에 직장생활연구소를 찾아왔던것 같다.

 

▶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은?

가장의 퇴사에 대해 좀 더 고민해 보고 싶다. 내가 이렇게 해서 이렇게 극복했다가 아닌 공감할 수 있는 감정에 대해 논의하고 싶다. 가장이라는 무거운 책임에 퇴사가 더해졌을 때 느껴지는 공포감을 나누고 공감해 주고 어루만져주고 싶다. 위로해 주고 싶다. 그런 글을 써보고 싶다. 회사를 떠나서 8개월이 넘은 지금 나에 대해 알게 된 것 하나는, 나는 감정과 가까운 사람인 것 같다. 나의 감정에 대해서 솔직하고 담담하게 얘기하고 또 남의 심정에 대해 아무 조건없이 들어주고 공감해 주는 것을 좋아하고 잘하는 것 같다. 퇴사하기 전에는 몰랐던 퇴사 후에 수없는 감정의 깨짐을 겪고서 알게 된 나의 모습이다. 공대생으로 시작해서 개발자로 살면서 눈에 보이는 뭔가를 만들어 내는 논리적인 사람이라고만 생각했었다. 이런 나의 또 다른 모습도 회사를 떠나서 알게 되었다.

 

 

 

 

▶ 대책 없는 퇴사는 10층에서 떨어져 맨몸으로 땅에 부딪히는 것과 같다. 떨어져서 팔다리 뼈가 다 부서졌지만 죽지 않는 느낌. 온몸의 세포들이 절망하는 느낌이다.  세상에 홀로 남겨져서 내가 지구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처럼 느껴진다. 결혼을 했다면 자녀가 있는 가장의 것이라면 더욱 더 그 감정은 크고 무섭다.  가장 힘든 것은 이 감정은 겪어보지 않은 사람에게는 전혀 공감되지 않는 다는 것이다. 그리고 또 대부분의 직장인들이 이런 감정을 외면하려 든다는 것이다. 

그는 퇴사의 과정을 겪으며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하나씩 그리고 조금씩 자신을 알아가고 있었다. 퇴사라는 선택이 무엇에 기인했든 본인의 감정을 드러내고 표출해야 빨리 이겨낸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또 퇴직 후 찾아오는 죽음과도 같은 절망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은 자신과 자신을 믿어주는 '아내'일 것이다.  직장생활연구소의 모토처럼 세상의 모든 직장인, 아니 세상의 모든 아빠, 가장을 응원하고 싶다.   ◀





Copyright 직장생활연구소회사를 떠난 사람들   kickthecompany.com by 손성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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