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장난 TV가 가져온 일주일 간의 변화들



1. 식탁에서의 대화가 깊어졌다.  


그 동안 저녁을 먹을 때 아이와 채널 선점을 두고 다투었던 문제는 자연스럽게 사라졌다. 동시에 식탁앞 TV가 잘보이는 자리에 앉기 위한 작은 부딪힘도 자취를 감췄다. 왜 매일 그놈의 무한도전 재방송만 보느냐는 아내의 투정도 이내 사라졌다. 

대신 서로 눈을 보며 대화를 하기 시작했다. 그동안 식탁앞에서의 대화는 형식적이다 못해 테이프를 틀어 놓은듯 판에 박힌 것이었다. '학교에서 뭐했어? 재미있는일 있었어? 체육시간에는 어땠어?' 라는 대화였다. 하지만 TV 없는 저녁밥상의 대화의 깊이는 바닷물처럼 깊어 졌다. 일주일 간의 짧은 시간이었지만 아이의 친한 친구 서너명의 이름을 외우게 되었다. 그리고 같은 반에 거짓말을 잘 해서 싫어하는 친구가 있다는 것도 알았다. 아이가 인라인 스케이트를 배우면서 친구들에 비해 겁이 많아 무서웠지만 선생님의 칭찬을 받아 자신감이 생겼다는 것도 알았다. 아이가 자신이 3반이나 5반이 아닌 4반이 된 것에 감사하고 있다는 것도 들었다. 3반, 5반 선생님은 무섭다고 한다. 

나는 아아이게 거짓말 하는 친구라도 무조건 미워하지 말라고 얘기했다 그리고 그 친구에게 거짓말 때문에 느끼는 너의 감정을 솔직히 얘기하라고 말했다.  이번주 주말에는 인라인을 같이 타기로 약속했다. 또한 딱 한번 봤던 아이 담임 선생님의 얼굴을 애써 떠올리며 감사한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 대화가 깊어진 식탁은 매일먹는 똑같은 밑반찬도 허세세프의 음식처럼 맛나게 만들어 주는 힘이 있었다. 








2. 아이가 책을 꺼내기 시작했다. 


예전에는 회사에서 돌아와 보면 아이는 항상 투니버스 채널을 보고 있었다. 요괴워치, 검정고무신, 놓지마 정신줄 등등 내가 그 이름을 외울 정도다. 아이는 학교에서 돌아와서 내가 집에 도착하기 전 3시간 동안 내내 TV를 봤다. TV가 없다고 바로 책을 찾지는 않는다. 다음은 당연히 인터넷이었다. 오래전 쓰지않던 나의 넥서스7을 찾아서 유튜브 연결을 시도햇다. 하지만 인터넷도 연결이 안되니 와이파이도 무용이었다. 아이는 처음 2~3일은 짜증을 냈다. 하지만 이내 책을 집어 들기 시작했다. 물론 처음에는 오래 읽지 못했다. 

하지만 5일 정도가 지나니 자연스럽게 동화책을 집어 들었다. 44권짜리 전집을 사주며 당근으로 제시한 권당 300원씩 현상금은 필요가 사라졌다. 아이는 돈을 받는데 목적이 있던 때보다 더 집중해서 책을 조금씩 읽기 시작했다. 이미 읽었던 책이지만 동화책 주인공의 구두 색깔이 너무 이쁘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리고 자신이 읽은 책을 카테고리 별로 구분하기도 했다. 재미있는 책, 또 읽어 보고 싶은책, 좀 무서운책, 재미없는책, 아빠랑 다시 읽고 싶은 책, 이것이 아이가 구분한  카테고리 였다. 

그 과정에서 재미도 있고 또 읽어 보고 싶은책은 어떻게 하느냐는 질문을 받았다. 잠시 당황했지만 나는 이내 동그라미를 그려주며 교집합이라는 개념을 가르쳐 주었다. 그 교집합 동그라미의 끝은 올림픽 공원의 오륜기로 이어지고 오륜기는 다시 각 대륙의 이름 설명으로 꼬리를 물었다. 그리고 대륙의 이름은 다시 나라의 이름으로 연결됐고 나라의 이름은 아이가 가고싶은 여행국가를 결정하는 것으로 끝이 났다. 다시 책을 읽기 시작하며 생긴 꼬리의 꼬리를 무는 연상작용은 나에게도 꽤나 흥미 있는 일이었다.




3. 장남감을 다시 만지기 시작했다.


아이가 초등학교에 들어가면서 그동안 가지고 놀던 장난감은 모두 큰 상자안으로 자취를 감췄다. 대신 TV의 광고와 유튜브에 노출되는 트랜디한 장난감들을 찾기 시작했다. 최근에는 액체괴물이라는 미끄덩 거리고 잘 늘어가는 찐뜩한 물체(?)가 단연코 아이의 관심사 였다. 하지만 이것도 지겨워지자 다시 장난감 상자를 뒤지기 시작했다. 예전에 사주었던 바이올린 장난감을 가지고 연주 하는 폼을 잡더니 이는 방과후 교실에 바이올린을 신청하는데 까지 이르렀다. 그리고 여자아이라 영 관심이 없었던 블럭을 다시 만지작 거리기 시작했다. 나의 시각도 아이의 관점대로 바뀌는 걸까? 오늘 퇴근하는 길 지하철에서 잡상인이 파는 무려 5천원짜리 나노블록 도라에몽을 사왔다. 저녁을 먹고 블록과 함께한 한시간이 넘는 씨름은 나뿐 아니라 아이에게도 행복한 기억을 되살려 주었다. 물론 도라에몽 만드는 것은 실패했지만 말이다.  




4. 맥주를 덜 마시게 되었다. 


많이 먹지는 못하지만 나는 맥주가 좋다. 캔을 딸 때의 청량한 파열음과 살짝 얼린 맥주의 목넘김을 숭배하기 때문이다. 아이가 잠들고 11시 부터 시작하는 매일의 예능 프로그램을 볼때면 항상 맥주 금단증상에 시달렸다. 집앞의 마트에서 5개에 만원하는 맥주를 팔기 시작하는 여름의 초입부터 거의 매일 맥주를 마신것 같다. 하지만 맥주엔 땅콩이 아니라 티비가 한 세트 였나 보다. TV를 안보게 되니 자연스럽게 맥주를 마시지 않게 되었다. 책을 보면서 맥주를 마시는 일은 일주일로 익숙해 지기 어려웠나 보다. 일주일간 TV 없는 삶은 맥주도 없는 저녁을 만들어 주었다. 나를 파블로의 개처럼 행동하게 했던 인지하지 못했던 인과관계 하나를 깨닫게 되었다. 쓸모없는 지출이 줄어든 것은 덤이었다.  







5. 일찍 일어나게 되었다. 


4번에 따른 자연스러운 결과다. TV가 없으니 맥주를 안먹게 되고 그러다 보니 일찍 잠들게 되었다. 스마트폰 속의 뉴스와 각종 쇼설미디어 들은 이미 퇴근길에 다 섭렵을 했기에 잠자리까지 끌고가지 않았다. 일찍 잠자리에 드는 것은 처음에는 어색했지만 생각보다 빨리 적응 되었다. 10시 부터 12시까지 TV 앞에 앉아 맥주를 홀짝이며 무의미중에 전자파와 알콜에 적셔졌던 나의 뇌는 일찍 잠드는 행복한 경험을 했다. 그리고 행복한 밤의 뇌는 아침 기상시간을 빠르게 해 주는 선물을 주었다. 평소에 6시50분이 되어야 겨우 떳던 눈이 6시가 되기도 전에 번쩍 뜨였다. 아침에 일어나서 무슨일을 할까? 당연히 책을 읽게 되었다. 그리고 오늘 해야할 일 그리고 이번주 해야 할 일 등을 종이에 적게 되었다. 

새벽 한시간의 힘은 겪어본 사람만이 알리라. 작년 겨울 나의 첫책을 쓰기 위해 새벽잠을 포기했던 치열했던 경험이 떠올랐다. 하루는 산책을 하며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는 새벽 공기에서 알싸한 향기가 난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내가 사는 아파트 주변 나무 풀섭에는 많은 귀뚜라미가 숨어지내고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새벽에 일어나 책을 읽고 글을 쓰는 내 스스로가 조금 멋져 보였다. 일주일에 하루정도는 지각을 했던 습관도 지난 일주일간 한번도 없었다. 스스로 대견한 느낌이 들었다.   



우연히 시작된 나의 'TV없이 지내기' 실험은 9일째 되는 날 끝이 났다. 드라마 '용팔이' 금단증세에 시달리던 아내의 참을성 부족 때문이었다. TV서비스 제공회사 에서도 고칠 수없는 문제라고 둘러댔던 나의 말이 객관적으로 설득력이 적었다는 것을 나도 인정한다.  결국 나를 믿지 못한 아내는 밤 9시 반에 직접 전화를 해서 AS를 신청했다. 그리고 그 다음날 바로 TV는 정상이 되었다. 좀더 그럴싸한 알리바이를 만들었어야 했다.


하지만 TV 없이 지낸 일주일이 조금 넘는 시간 동안의 변화는 놀라웠다. 꼭 우연이 아니라도 삶의 변화를 만들어 줄 사소한 문제들이 나에게 일어났으면 좋겠다. 사실 그것은 문제가 아니라 내가 인지하지 못하지만 내 삶에 달라 붙어 있는 대장속의 숙변과 같은 '삶의 찌꺼기' 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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