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적 생각, 합리적 질문



창조적 생각, 합리적 의심


김춘수의 꽃이라는 시를 배웠던 것은 고등학교 시절이었던 것 같다. 우리는 모두 선생님이 해주는 그 시의 강독을 들으며 열심히 밑줄을 그으며 받아 적었다. 이 시의 첫 행의 ‘이름을 불러준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고, 이름을 불러준 이후의 ‘꽃’의 의미에 대한 해석이었다. 고등학교의 국어 시험에서 시라는 부분은 너무 뻔하다. 시인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이고, 시안에서의 단어의 뜻은 무엇인지를 묻는다. 


창가 자리에 앉았던 나는 눈을 돌려 운동장 옆 화단의 꽃을 보았다. 나는 진심으로 궁금했다. 김춘수 라는 시인이 과연 참고서에 누군가가 해석한 그 의미대로를 시를 쓴 것일까? 혹시 너무나도 사랑했던 여인이 있었는데 그 여인을 꽃에 비유하면서 그녀에게 인정과 사랑을 받고 싶은 마음을 쓴 것은 아닐까? 혹은 사랑하는 연인과의 첫 키스를 잊지 못하고 그 입맞춤의 순간을 ‘이름을 불러준 것’으로 표현하며 밤새 불면의 시간을 보내다가 문득, 밝아오는 아침햇살에 창가에 비치우는 한 떨기 꽃을 보며 떠오른 심상으로 쓴 시가 아닐까?  어떻게 그 시인이 아닌데 또 시인에게 물어본 것도 아닌데, 참고서의 작자들은 시인의 의도를 알아냈는지, 또  어찌하여 우리는 고등학교 교실에 앉아서 선생님이 설명하는 대로 배우고 있는 것인지 너무나도 궁금했다.



김춘수 시인이 그 시를 정말 그런 생각으로 썼던 것일까? 

우리가 배우는 것은 시인의 생각이 아닌 평론가의 추측을 배우고 있는 것이 아닌가?

차라리 시를 읽고 ‘작가의 심정은 어떤 것이었을까?’에 대해 토론하며 생각을 나누는 것이 낫지 않을까? 



나는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손을 들었다. "선생님. 정말 김춘수 라는 시인이 이 시를 쓸 때의 감정이 선생님이 말씀해 주시는 것과 같은 것이 맞나요? 그냥 평론가나 국문 학자들이 ‘아마도 이런 생각이었을 것이다.’ 라고 추측한 것을 우리가 배우고 있는 것이 아닌가요? 그렇다면 우리는 잘못된 것을 배우는 것 아닌가요?"


선생님의 동공은 흔들렸고, 졸던 아이들은 잠에서 깬 듯 술렁거렸다. 결론부터 말하면 나는 정확히 30초 후에 칠판 모서리에 두 손을 얹고 선생님에게 몽둥이로 맞고 있었다. 선생님은 제법 똑똑하고 모범생인 학생이 선생을 당황하게 만들고 튀고 싶어서 현학적으로 개기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진짜 이유는 교편을 잡은지 15년이 된 선생님도 의심해 보지 않았던 것을 물어보았고 답하기 어려웠기 때문이었을 것이리라.  


수업이 끝나고 내 고딩 친구들은 불타는 내 엉덩이에 바세린을 발라주며 이런 얘기를 했다. 너는 한국의 교육 체계에서는 맞지 않는 사고를 가진 놈이라고, 그러니 차라리 대학을 외국으로 가서 공부하라고 말이다. 









얘기하고 싶은 것이 두가지 있다. 

우선 창조적인 생각이다. 

회사에서 정말 창의적인 인재를 원한다면 사람을 평가하고 뽑는 사람부터 바꿔야 한다는 것이다. 회사 안에 들어와서 교육과 경험을 통해서 창재가 되기를 바라는 것은 지렁이가 용이 되기를 바라는 것과 같다. 그건 불가능 하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을 뽑을 때부터 창조적인 사람을 뽑아야 한다. 따라서 사람을 뽑는 사람 자체를 바꿔야 한다. 채용 시 면접을 보는 임원, 팀장 모두 과거의 사람이고 천편일률적인 교육을 받은 사람들 뿐이다. 창조적인 사람을 뽑을 수 있는 시선 자체가 없는 경우도 있다.  그런 사람들이 자신의 20년 이상의 사회생활 경험에 굳어진 기준으로 뽑는 사람은 ‘말을 잘 들을 것 같은 사람, 굳어진 회사 문화에 적응을 잘 할 것 같은 사람’일 뿐이다. 



타당하고 합리적인 의심이다. 

창의성은 ‘왜 꼭 이래야만 하지?’, ‘이것이 맞는 것일까?’ 라는 생각부터 시작된다.  우리는 남들이 그래야 한다고 말하는 것, 그것이 맞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에 익숙하다. 그리고 그것이 모두 맞다고 받아들인다. 중고등 학교 때는 오로지 좋은 대학에 가는 것 이외에는 목표가 없다. 대학에 들어와서는 좋은, 누구나 다 아는 회사에 취업하는 것이다. 그리고 30대 초반이 되면 괜찮은 사람 만나서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대출을 받아 집을 사고 갚아 나가고 그렇게 사는 것이 맞다고 생각한다. 그런 생각을 암암리에 강요 받는다. 컨베이어 벨트위를 지나가는 부품같은 삶을 사는 것이 맞다고 믿는다. 누군가 그 길을 벗어나면 이상한 사람이 된다고 믿는다. 끝까지 그렇게 믿는다면 종국에는 남들과 비슷한 삶의 의미와 가치를 찾지 못한 ‘컨베이어 벨트 라이프’를 살게 된다. 게다가 자본주의 사회에서 남들이 권하는 것으로만 선택지를 삼다보면 정말 정해진 인생 그대로를 살게 된다. 타인의 권면의 진짜 의도를 모른다면 삶은 타인에게 목 졸려 흔들리게 된다. 







ⓒ 직장생활연구소 ::  kickthecompany.com Written by 손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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