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를 떠난 사람들 20 _ 일하면서 배웠다. 그리고 1인 기업가가 되었다. 1


▶ 자기소개

저는 1970년생, 올해 마흔 일곱 살의 김용빈입니다. 개발마케팅연구소의 소장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주로 아프리카와 신흥시장에서 신사업 개발과 개발협력 (쉽게 말해 원조) 사업을 만드는 일에 대한 자문, 연구, 강의, 기고를 하고 있습니다.

 

▶ 커리어를 간단히 설명해 달라.

한국외대 포르투갈어 학과 89학번이다. 군대를 학사장교로 갔는데 961월에 앙골라에 평화유지군 파견인력을 뽑는다는 국방일보 공고를 보고 지원했다. 앙골라는 포르투갈어를 쓰는 국가이고, 어학연수를 못 간 나에게 무언가 기회가 될 거라고 생각했다. 가수 신정환도 1진 인력으로 거기에 있어서 실제로 만났었다. 96년 일 년 동안 앙골라에서 근무를 했었다. 그 우연한 시작 이후로 나의 모든 일과 삶의 나침반이 아프리카로 향하게 되었다. 포르투갈어를 전공한 많은 사람들은 주로 브라질 일을 하는데 나는 군생활의 경험 때문인지 아프리카와 계속해서 인연이 닿았다.

 

▶ 전역 한 이후에는 어땠나?

99년에 전역 이후 다른 회사에 근무하다가 2000년 우연히 삼성물산 상사부문에서 아프리카 앙골라에서 컨츄리마케팅(country marketing)’을 한다는 내용의 신문기사를 봤다. 그걸 보고 무작정 삼성물산 홈페이지의 웹 마스터 이메일을 찾아서 무작정 메일을 보냈다.

나는 포르투갈어를 전공했고 앙골라에서 군생활도 했고 외대 경영대학원에서 “(앙골라와 남아공이 포함된) 남부아프리카 경제공동체관련 논문도 썼다. 지금 삼성물산에서 시작하려는 사업에 흥미가 있는데 나 같은 사람이 필요하면 연락을 달라는 내용이었다. 그 메일을 보내고 2시간만에 답장이 왔다. 인사팀에서 보고를 위해서는 좀 더 자세히 알아야 할 필요가 있으니 이력서를 보내달라는 것이었다. 아마도 사람을 찾고 있었던 것 같았다. 그 후에 실무자, 임원까지 면접을 보고 2000년에 삼성물산에서 경력공채로 입사를 했다. 당시 삼성물산의 실무자 중 아프리카에 대해 깊게 전문성이 있는 사람이 적었고 아프리카 일을 하기를 모두 꺼려했던 것 같다. 그 후 2011년까지 삼성물산에서 일한 후, GS건설로 옮겨서 3년간 더 직장생활을 하고 나서 2014년에 회사를 떠나 1인기업가로 독립했다.  

 

▶ 아프리카 관련 일은 생소하다. 어떤 일인가?

내가 몸담았던 곳은 프로젝트 사업부였다. 쉽게 말해 해외에서 수주하거나 투자할 새로운 프로젝트를 만드는 일을 하는 곳이다. 건설, 정유공장, 가스 충전소, 통신라인, 발전소 등의 인프라를 만드는 일을 주로 하는 조직이었다. 그런 사업을 개발하면서 가장 첫 번째로 사업의 모습을 그리는 일을 했다. 구두를 닦는 경우도 찍새딱새가 있다. 찍새는 상품을 물어오는 것이고 딱새는 그 일을 실제로 실행 하는 것이다. 나는 소위 아프리카의 신사업의 아이템을 물어오는 가장 최전방의 찍새였다.

 

▶ 어떤 일을 해서 어떤 성과가 있었나?

오천 헥타르 정도 되는 땅에 관계수로를 만드는 일, 연안 운송 프로젝트, 데이터센터 개설 같은 일에도 관여했다. 해외사업을 하는 사람의 능력은 지역전문성, 기능전문성, 아이템전문성으로 볼 수 있다. 언어와 통상을 전공한 나의 경우 아이템전문성이 약할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수많은 현장을 찾아 다니며 배웠다. 양계 프로젝트가 있었는데 이것에 대해 배우는 데만 6개월이 걸렸다. 기본적인 책을 몇 권 읽고, 사료공장, 도계공장 등을 찾아 다니면서 고수들에게 배웠다. 아프리카 최전방에 혈혈단신 혼자 나가서 싸워야 하는데 내가 기본적인 것도 모르면 커뮤니케이션도 안되고 중요한 부분을 놓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매번 프로젝트마다 공부를 하며 배워서 나갔다. 나는 아프리카라는 지역에 대한 전문가 베이스였기 때문에 늘 배우는 것을 소홀히 할 수 없었다.

 

▶ 본인이 계획을 세우고 행동도 하고 성과도 얻고 책임도 지는 이런 일을 회사에서 경험하기는 쉽지 않다. 회사를 떠난 지금 보면 엄청나게 소중한 경험인 것 같다.  

지금 보면 너무 많이 배우고 성장했다. 하지만 회사 다닐 때는 그것이 힘들고 너무 싫었다. 처음부터 내가 기획하고 내가 실행하고 책임지고 맨땅에 헤딩해야 했기 때문이다.  스스로 배워서 스스로 일하는 것을 좋아할 사람은 없다. 힘들기 때문이다. 대기업 시스템 속에서 편하게 배우는 것을 보통은 원했을 것이다. 입사 후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더 이상 가르쳐줄 사람이 없었던 것도 힘들긴 했다. 삼성물산이 공채 출신에 대한 순혈의식이 매우 강한 곳이었다. 그런 곳에 결원 혹은 신사업 개발을 위한 충원 때문에 뽑힌 것이 아니었다. 내가 스스로 메일을 보내서 나 필요하지 않니?’라고 물어서 들어온 사람을 조금은 삐딱한 시선으로 본 것도 사실이었다. 회사를 떠난 지금 돌아보면 회사에 들어가서부터 혼자 일하는 연습을 했던 것 같다.

 

▶ 회사원일 때 본인은 어떤 사람이었나?

나는 삼성스럽거나 직장인스럽지 않은 사람이었다. 삼성은 삼성이 원하는 삼성맨’, ‘삼성다움의 가치가 있고 그것을 신입 때부터 가르친다. 하지만 나는 그런 사람은 아니었다. 회사 다닐 때 내 별명은 영업연구직이었다. 영업을 연구하듯 한다는 뜻인데, 무언가 한번도 선례가 없던 일을 만들어 냈기 때문이었다. 선배들이 뭐 하러 아무도 하지 않는 일을 하냐? 시키는 일이나 잘해라라는 말을 많이 들었다. 선배들이 하던 것과 똑같이 해봐야 그것은 내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지금 상황에서야 말은 이렇게 하지만 나도 처음에는 매우 불안했다. 아무도 하지 않았던 일을 하는 건 위험한 일이었다. 하지만 정말 운이 좋게도 처음에 시작한 몇 개의 프로젝트에서 성공을 거뒀다. 그러니 그 다음부터는 아무도 나에게 새로운 일을 하는 것에 대해서 뭐라고 하지 않았다. 성과가 나니까 간섭이 확 줄었다.

앙골라 양계사업을 개발할 때 일이 기억난다. 총 규모가 600억이 넘었다. 이 사업을 만들기 위해서는 출장도 가야 하고 외부 업체를 동원해 사업성검토(FS) 보고서도 써야 했다. 하지만 회사에서 돈을 주지 않았다. “뭐 하러 아프리카에 양계사업을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당신이 닭에 대해 뭘 야냐? 고작 프라이드 치킨이나 시켜 먹는 것 빼고 없지 않냐라는 얘기를 들었다. 아무리 얘기를 해도 설득이 안됐다. 그 때 마침 정부에서 주는 신사업개발 지원자금이 있었다. 입찰을 통해 1억원이 조금 넘는 자금을 마련, 컨설팅 회사와 함께 사업계획을 준비했고 결국 수주를 했다. 그렇게 성과를 회사에 보여 주니 그 이후로 아무 말도 없었다.

시작은 정말 쉽지 않았다. 아무도 해본 적이 없으니 안 된다는 Fast follower 문화가 지배하는 회사에서 회사 동의없이 신규 사업을 개발하는 것은 정말 맨땅에 헤딩이었다. 회사 일을 하면서도 회사의 지원없이 시작하는 일이 있었던 거다. 어찌 보면 나는 회사에 다니면서 혼자 창업해서 일하는 과정을 일부 경험했다고 할 수 있다.






 

▶ 회사에서 승승장구 했는데 왜 회사를 그만뒀나?

그 동안 새로운 일을 하면서 계속 배우는 즐거움으로 회사를 다닌 것 같다. 하지만 10년 정도가 되니 한계가 명확히 보였다. 또 다른 이유는 더 배우고 성장하기 위해서 박사과정에 간다고 했을 때 극렬히 반대하는 걸 보고 정이 많이 떨어졌었다. 회사 입장에서는 계속 나를 돌려서 매출을 뽑아내야만 했다. 간단히 말해 회사에는 100억을 버는 소수가 있고 0원을 버는 다수가 있다. 0원을 보는 사람에게 50억을 벌라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100억 버는 놈을 다그쳐서 150억을 벌게 하는 건 가능하다. 그래서 시간을 뺄 수는 없다는 것이 회사의 논리였다.

하지만 내 입장에서 보면 그 동안 그렇게 힘들게 회사에 돈을 벌어다 주었는데 이 정도 요청도 못 들어 주냐? 라는 생각이 들었다. 더구나 학위과정 지원요청에 대해 박사과정이 업무와 연관성이 없다는 인사팀의 회신을 듣고 정말 정이 훅 떨어져 버렸다. 일도 무언가를 채워가면서 해야 한다. 10년간 일했으니 조금 더 채우고 더 달리려는 마음을 몰라주었다. 그냥 회사는 빼가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렇게 회사와 트러블이 있었을 때 팀장이 외국어생활관에 가라고 기회를 줬다. 세 달간 언어만 배울 수 있는 삼성의 좋은 시스템이었다. 거기에 가서 기숙사에 가서 조용히 생각을 하며 산을 바라 봤다. 서른 살에 육군에서 제대하며 한 고민은 앞으로 뭐할까?’ 정도였다. 남자가 마흔 살에 느끼는 불안과 답답함은 말로 하기 힘들다. 남자에게 마흔은 엄청나게 큰 의미다. 10년간의 회사 생활 동안 무얼 했나 하고 돌아보니 내 힘으로 한 것은 없었다. 개인적으로 결혼해서 가정을 이룬 것뿐이었다. 그 때 결심을 했다. 지금 마흔인데 지금을 딛고 일어서서 현역으로 80살까지 살겠다는 다짐을 했다.

지금 돌아 보면 나는 삼성이 강요하는 그런 조직문화에 젖어 들지도 않았고 회사가 나에게 크게 강요하지도 않았던 것 같다. 삼성 내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얘기하면 내가 다른 회사를 다니고 있다는 생각이 들 정도라고 했다. 원래부터 회사를 길게 다니고 싶은 생각이 없었던 지라 규제에 크게 신경을 쓰지도 않았던 것 같다. 길들여 지지 않은 것이 지금의 나를 만든 것일 수도 있겠다. 

 

▶ 단지 그것만이 이유였나?

사업(프로젝트) 개발 분야에 있는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조직의 이름을 등에 업고 간다. 상품 트레이딩과 달리 조직의 힘과 지원이 있어야만 일이 가능하고 혼자 나가서 프리 에이전트로는 일하기가 어렵다는 것이 정설이다. 즉 개인이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러다 보니 그때까지 내가 해온 일과 성과가 개인이 한 일이 아니라 삼성 로고가 찍힌 명함이 한 일인 것 같았다. 냉정히 생각해서 이 성과 중 온전히 내가 만들어 낸 것은 과연 몇 % 일까 궁금해 졌다. 그 질문의 답을 구할 수 있는 방법은 하나였다. 계속해서 회사에 있으면 그 답을 찾을 수 없었다. 그 조직을 떠나봐야 알 수 있는 답이었다. 삼성 명함과 내가 완벽하게 분리되어 봐야 나의 역량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것도 이유 중 하나다.

 

▶ 회사와의 분리를 위해 준비를 한 것이 있다면?

공부를 했다. 삼성물산에 있을 때부터 박사학위 공부를 했다. 오랫동안 돌아다니며 현장에 부딪히며 실무를 했는데 이런 경험이 이론과 맞물려 있지 않는 느낌이 들었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이 전체의 그림을 모르고 코끼리 다리를 만지고 있었던 것 같았다. 그리고 내가 일하는 국제개발협력이라는 업계는 학력 인플레이션이 심한 곳이다. 거의 대부분이 명함에 PH.D. 라고 찍혀 있다. 이런 것들을 생각해서 결정한 것이 회사가 말렸던 박사학위 취득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최근 내린 결정 중에 가장 잘한 결정이었다. 공부를 하니 그간에 쌓은 내 경험의 조각들이 맞춰지며 하나의 멋진 그림이 그려지는 느낌이었다.

게다가 공부를 하면서 나의 경험을 바탕으로 독립을 할 수 있는 아이디어를 얻었다. 그 동안은 사업개발이 조직없이 개인적으로 버틸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이 정설이었다. 개발 아이디어를 내고 그것을 현실화 시키는데 시간과 돈이 들고 그것을 실행하고 만약 잘 돼서 성과가 나도 몇 년 후에야 현금이 Income으로 잡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개인이 버틸 수 있는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회사 안에만 있었으면 생각을 못했을 것이다.

 

▶ 1인 기업이다. 보통 회사에서 일한 것의 연장선으로 출간, 강의, 교육으로 한정되는 경우가 많다. 본인이 생각하는 1인기업가의 요건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지금 나에게 들어오는 강의도 조금씩 뻔해진다. 뻔해진다는 말은 일반적 (General)이고 범용적인 것을 말한다. 여러 사람들의 욕구를 충족할 수 있는 것이다. 예를 들면 ‘1인기업 독립하기그리고 직장에서 어떻게 배우고 공부해야 하나?’ 이런 것이다. 불특정 다수를 위하는 것이기에 원하는 것이 비슷비슷해진다. 그렇다 보니 현재 상태만으로는 1인기업이라는 것도 한계점이 보이는 듯하다.

하지만, 나의 경우는 주 수입원이 기업들의 사업개발을 돕는 자문이다. 비즈니스 모델로는 관점을 디자인하라라는 책을 쓴 박용후 씨와 비슷하다는 생각을 했다. 한가지 잘 할 수 있는 일을 가지고 여러 회사나 개인의 일을 돕는 것이다. 나도 박용후씨를 보고 1인기업으로서 나의 비즈니스 모델을 가다듬었다. 해외사업개발 쪽으로 새로운 일을 하고자 하는 회사인데 중량급을 정직원을 채용하기에는 인건비 부담이 있는 중견회사에 사원~대리 월급 정도를 받으며 원하는 일을 해주는 쪽으로 일을 하고 있다. 사업 단위나 시간 단위 자문 형식의 계약도 있다. 해외사업 개발이라는 하나의 리소스를 가지고 여러 회사의 일을 해 주는 형태다

원 소스 멀티 유즈의 1인기업 모델이다. 그렇게 하면 나도 시너지가 많이 생긴다. 회사의 사업개발 업무뿐 아니라 우리나라와 상대방 국가에서 생기는 대관업무까지 지원하기 때문에 나쁜 형태는 아니라고 본다. 회사 입장에서는 접근하기 어려운 일인데 내 입장에서 보면 원래 하던 일에 하나의 일을 더 하는 것이기에 양쪽이 모두 좋은 것 같다. 앞으로도 이런 식으로 상당기간 유지될 것 같다.

 

▶ 그럼 회사 일을 하면서 일인 기업의 일은 어떻게 준비 했나?

회사 다니면서 개인 일의 시도를 했었다. 간단한 자문이나 글을 쓰는 일을 2년동안 했었다. 어찌 보면 그것이 직장인에서 1인기업으로 가는 오버랩 기간이었다. 나는 전형적인 생계형 직장인이다. 갑자기 회사를 그만두게 되고 그 이후에 1인기업으로 일이 잘 안되면 생활을 해 나가기가 힘들다. 그렇기 때문에 나의 능력이 혼자서 사회에서 먹힐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해야만 했다. 돌다리를 두들겨 보는 과정은 꼭 필요했다. 연말에 계산을 해 보니 내 2개월치 월급 정도가 나왔다. 내가 집사람이나 회사도 모르게 일해서 이 정도면 아예 본업으로 뛰어 들면 6개월 정도의 월급은 벌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최소한 굶지는 않고 살아갈 수는 있겠구나 라는 판단이 섰다. 그렇게 확인을 하고 나서 회사를 그만두고 나왔다. 준비없이 그냥 박차고 나오는 것은 매우 매우 위험하다.

 

▶ 회사를 나올 때 대기업 부장이었다. 인터뷰이 중 가장 직책이 높다. 연봉도 많았을 텐데 고정수입이 끊긴다는 두려움은 없었나?

조금은 두려움도 있었지만 나오자마자 첫 달부터 수입이 발생했다. 회사를 나오기 전에 자문계약을 하나 체결하고 나왔기 때문이었다. 퇴사 전에 KOTRA 사이트의 지역전문가 칼럼란에 교수나 연구원이 쓰는 학술적인 글이 아닌, 잘 읽히고 임팩트도 있는 글을 쭉 연재 하고 있었다. 그 칼럼이 호응도 좋았고 평도 좋아서 정부의 일도 따낼 수 있었다. 마지막 출근 하는 날 정부기관에서 연구용역 계약도 받았다







- 2 편으로 이어집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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